좋은 연극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연은 연극인대상 9월 2차 공연 지원때 보겠다고 지원했던 연극인데, 그 때 1지망이 "지상 최후의 농담"이었고, 2지망이 이 공연이었다. 사실 그렇게 땡기는 연극은 아니었다. 중년 남성의 상실감과 자아 찾기 어쩌구...라는 설명을 보고 나서 아, 이거 그냥 신파극 아닌가..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2지망은 사람들이 많이 고르지 않은 걸 골라야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이 연극을 선택했다. 많이 보고 싶었거든. 가기 전까지도 약간 찝찝했는데, 보고나서 생각하니 꽤 잘 고른 연극이었다. 역시 사람일은 모르는거.. 이런식으로 로또나 좀 어떻게..

 

 연극 무대는 문을 상징하는 나무틀과 테이블, 의자 두개, 스탠드, 냉장고로 구성되어있었고, 배경은 텅 비어있는 그대로 두었다. 마치 이사짐을 싹 빼고 기본 옵션만 남아 있는 텅 빈 집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연극 속에서 무대가 상징하는 공간은 수시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알려주는 것은 무대장치가 아니라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 뿐이다. 구체적으로 제시된 상황이나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내를 잃고 할 일도 없는 쓸쓸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라는 건 알겠는데, 중년 남성 이외의 인물들은 죄다 요상하다. 


 "어디서부터가 똥이고, 어디서부터가 된장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라는 중년 남성의 대사가 강하게 날아와 꽂혔다. 뭐가 사실이고 뭐가 상상인지, 이 무대가 나타내는 장소가 어디인지 구분할 필요도, 알 필요도 없었다. 지나온 일들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식의 흐름이라고 느꼈다. 비어있는 공간은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만으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관객들로 하여금 상상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변해버린 사회와 변해버린 자신의 위치와 역할, 여기서 오는 허탈감과 상실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정하고 있었던 현실을 은유적인 상황들로 표현했다. 자칫 지루해지고 집중력을 잃기 쉬운 내용임에도 굉장히 몰입해서 볼 수 있었는데, 이 것은 모두 배우들이 극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잡아당겼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특히 중년 남성 역의 이창호씨와 범죄자 역의 김명섭씨의 열연은, 텅빈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무대가 꽉 차고도 모자르다고 느낄 정도로 폭발력 있었다.


 공간의 모호함과 중년 남성의 의식의 모호함이 맞닿아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몽롱하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는 영화라면 연출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 눈 앞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진짜로 '잘 본'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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