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에 이어서 안톤 체홉의 또 다른 희곡작품을 보았다. 이 사람의 작품을 두 개 정도 보고 나니까 어떻게 작품을 썼는지, 왜 특별한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사랑받아 왔는지 알겠더라.

 

 편곡을 했거나 리메이크를 한 노래들을 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원곡의 아우라 안에서 노래하거나, 원곡을 완전히 재해석해서 새로운 노래를 내놓던가. 사실 전자의 경우는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가 주는 감동을 이미 느낀 상태에서 목소리와 편곡만으로 새로운 감동을 선서해야 하는데, 이는 확실히 원곡의 감흥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후자가 무조건 올바른 편곡과 리메이크의 예냐...면 그건 또 아니다. 원곡을 분해해서 재해석하기에는 원곡 자체가 가진 멜로디나 편곡이 충분히 극적이고 감동적이어서,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원곡이 주는 감동도, 새 편곡이 주는 감동도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곡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 확실히 리메이크를 할 때는 편곡의 여지가 많은 노래가 유리하다. 기승전결이나 하이라이트가 확실했던 곡의 경우는 리메이크를 들으면서 원곡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안톤 체홉의 작품은 인물관계가 복잡하게 꼬여있는 반면에, 도드라지게 부각시키는 인물관계가 없다. 흐름이 있는 것은 알겠지만, 이 흐름이 굉장히 밋밋하다. 마치 서해바다의 넓은 뻘에 아주 천천히 밀물이 밀려오듯하는 느낌이다. 극속의 갈등도 서해바다 파도처럼 있는듯 마는듯 어정쩡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어왔을 것이다. 작품의 플롯을 쫓아가다가 얻게 되는 희열이나 카타르시스나 분노와 같은 격한 감정은 이 작품에선 찾을 수 없다. 이 작품을 보러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면서 오는게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도 볼 수 있고, 세 번도 볼 수 있다. 반전을 알고 나면 시시해지는 그런 영화, 두 번 보기 어렵잖아? 이 작품은 인물들의 대사들을 통해서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는 많은 사건들을 나름대로 구체화 해 보면서, 다양한 감정과 상황으로 변형하여 연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포인트 때문에라도 다시 찾아봐도 좋을 연극이다. 희곡까지 같이 본다면 더더욱 좋을 것 같고.

 

 물론 이런 시시한 이유만으로 고전이 되었다면 그건 말도 안되는거고.. 이 작품속에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또 적응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이 느끼게 되는 절망감에서 현대인의 절망감이 오버랩 되었다. 이 작품의 배경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러시아 사회를 배경으로 했다면, 현대사회는 그 이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기 때문에.. 30대가 되고나서 자꾸 과거의 아름다운 것들을 찾게 되는 내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내어준 절망속에서도 이상만을 생각하는 류보비 부인이나, 말만 많은 젊은 지식인  뻬짜나, 현실에 재빠르게 적응한 로빠힌, 가진것 없는 꼰대 레오니드, 그리고 결국 저택을 떠나지 못하는 피르스까지.. 이 연극에는 이렇듯 보편적인 인간 군상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00여년을 내려오면서도 끊임없이 공연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고전들을 들여다보면 특별하지는 않다. 특별한 것 보다는 보편적인 가치를 우선순위에 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결코 새롭지는 않다. 사실 여기 캐릭터들도 현대 희곡의 많은 캐릭터들에 비하면 밋밋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들이지 뭐. 아주 재밌거나 아주 좋았던 연극은 아니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연극이기는 하다. 물론 다른 배우와 다른 연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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