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anescence

팬에게도, 혹은 팬이 아니었던 이에게도.

어떤 이에게 이번 공연은 Fan이 된지 10년만에 내한하는 설렘 가득한 공연이었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얼터너티브의 전설급인 그들이 왜 게스트에 불과하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하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공연은 전자에게나, 후자에게나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을지언정, 분명 가슴 벅차고 잊지 못할 순간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에반에센스와 부쉬의 팬은 아니었지만, 10년만에 Bring Me To Life를 들으면서, 혹은 94년에 나왔다는 부쉬의 데뷔 앨범 Sixteen Stone을 들으면서 많이 설렜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난 듯한 설렘이 에반에센스에게 있었다면, 알던 친구의 모르던 멋진 면모를 발견한 기쁨이 부쉬에게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이 공연은 가슴이 터지도록 벅찬 순간이었다.


예상보다 적은 관객 수, 어쨌든 놀 준비는 끝났다.

조금 일찍 공연장인 악스홀에 도착하니 유리 벽면 가득 붙어있는 걸개와 포스터가 우릴 반겨줬다. 이제 곧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간 친구나, 푸른 눈의 외국인들이나, 가죽자켓 입은 록커st.의 청년이나, 모두 똑같이 설레고 흥분된 표정이었다. 짐을 물품보관함에 쑤셔 넣고 가벼운 복장으로 스탠딩석으로 들어섰다.

표가 엄청 안 팔렸다고 하더니 확실히 사람이 적었다. 그럼 어떠랴, 관객 입장에선 쾌적하고 좋더라. 공연장위에BUSH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걸개가 눈에 띄었다.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복장으로 들어가니 마음은 이미 날듯이 가벼워졌다. 놀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와라 부쉬!!


무대매너 폭발, 섹시 카리스마 BUSH!

스티븐 시걸을 연상케 하는, 곱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한 Bush의 보컬 개빈(Gavin Rossdale)이 등장했다. 별다른 멘트 없이 그들의 데뷔앨범에 수록된 Machinhead와 신보의 Baby Come Home을 연달아 불렀다. 분명 앨범에서 좋게 들은 곡들이고, 놀 준비도 되어있었는데, 생각만큼 신나지 않았다. 주변 반응도 그저 그래보였다. 아직 이들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되지 못한 탓이었을까. 하지만 상황은 보컬 개빈이 가죽재킷을 벗고 나시티 차림으로 굵은 팔뚝을 자랑하며 등장한 세번째 곡 Everything Zen부터 완전히 반전되었다. 원곡도 들어보고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버젼도 들어봤지만, 원곡보단 라이브 버젼이, 라이브 버젼보단 현장에서 보는 것이 좋았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뭐랄까, 공연의 흐름과 분위기를 잘 탄다고 해야 할까. 20년차의 내공은 역시 대단하다. 진짜 미쳤다. 현장감은 이래서 중요한거다!


이어서 신보의 타이틀곡인 The Sound of Winter를 지나 The Afterlife에서는 기어코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 오셨다. 펜스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 순간 관객의 핸드폰을 뺏어서 그 핸드폰 카메라로 관객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나중에 올라온 영상 보니 관객들 정말 신나있더라.) 시원한 보컬과 신나고 악동스러운(?) 멜로디 라인이, 그 어떤 곡보다도 핸드폰으로 찍은 B급스러운 뮤직비디오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장 내의 어느 한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가 Bush의 매력을 제대로 느낀 순간 이었을 것이다. 폰 주인은 계탔다.


이어진 Little Things도 역시 원곡 이상으로 좋았고, 이어서 비틀즈의 Come Together를 하드하게 커버했다. "Come Together/ Right Now/ Over MEEEEE!!" 네, 함께 떼창하며 열심히 따라가고 있어요. 이어서 기타 하나와 개빈의 보컬로 소박하지만 애잔하게 꾸며진 Glycerine이 연주되었다. 여자분들 녹아내립니다. 마지막 곡은 1집 수록곡인 Comedown이었다. 나름 Bush노래 중에서 엄청 히트곡인데, 마지막에 연주를 멈추고 관객 떼창을 유도 했지만 생각보다 소리가 조금 작아 살짝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다만, 에반에센스보다 부쉬를 보러온 듯한 많은 관객들(특히 외국인 관객 중에 그런 분들이 많았다.)이 소리 높여 따라 부르는데, 왠지 정말 부러웠다. 가사라도 좀 외워 갈 것을... 너무나 좋은 공연이었기 때문에 소리 높여 부르는 떼창으로나마 그 좋은 공연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제발 한 번만 더 왔으면 좋겠다. 꼭 소리 높여 함께 부르고 싶다.


두근두근 뛰는 가슴, 하지만 너무 길었던 인터미션.

9곡이 이어진 부쉬의 공연이 끝나고 인터미션이 되었는데, 계속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왠지 하다 그만 둔 것 같고, 한시간만 더 놀아줬으면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에반에센스만 알고 공연장에 갔던 많은 이들이 Bush의 노래도 집에가서 찾아봐야겠다며, 너무 좋았다고들 입을 모았다. 더 아쉬웠던 점은 20분간 진행된다던 인터미션이 왜 30분이 넘어도 끝나질 않는거냐... 두 팀 모두 밴드라서 셋팅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은 이해하지만, 끓어 올라 넘치던 에너지와 흥분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마성의 카리스마, 에반에센스의 공연!

그리고 그들이 등장했다. 에반에센스! 첫 곡은 신보의 타이틀곡 What You Want였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첫 곡의 강렬한 기타리프에서 오는 쾌감이 짜릿했다. 그런데, 목상태가 썩 좋지 않다. Going Under와 The Otherside를 연달아 불렀는데, 엄청 힘들어 보인다. 음이탈 실수도 잦았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말하는 보컬 에이미 리(Amy Lee)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수시로 목을 축이고 목에 스프레이를 뿌려보지만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 물론 에이미 리의 라이브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단순히 그 문제가 아닌듯 보였다. 보컬 소리가 작은 것이 사운드 문제도 조금 있어보였다. 어쨌든 그녀는 혼신을 다했고, 현장 분위기는 좋았다. 일단 음악이 강렬하니까 별 생각 없이 신났다.

Weight Of The World와 Made Of Stone까지 멘트는 짧게 하면서 연달아 노래를 불렀다. 인터미션이 길어서 짧은 시간에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한편으로는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예상했던 Set List와 유사하게 나갔지만 좋아하던 My Last Breath는 듣지 못해 아쉬워하던 찰나, 무대 중앙에 피아노가 등장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Lost In Paradise를 부르는데, 이때부터 목소리가 한층 안정되었다. 에이미 리는 엄청 몰입하게 되는 마력이 있다. 특히 피아노 한대로 도입하는 부분, 긴장되고 설렌다.


3집 수록곡 My Heart is Broken과 2집의 Litium에 이어 잔잔하게 부르는 Swimming Home까지. 피아노를 치며 총 네 곡을 불렀는데, 네 곡 모두 반응도 좋았고, 개인적으로도 이번 에반에센스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다. 먹먹하면서도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다. 이어진 Sick에서는 다같이 "Sick of it all!!"을 떼창. 속이 다 후련하다! 어느덧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어진 세곡은 모두 1, 2집의 히트곡들이었다. Call Me When You're Sober, Imaginary, Bring Me To Life로 이어지는 라인. 에이미 리의 목은 완전히 풀려서 목소리를 쭉쭉 뽑아내고 있었고, 곡들이 시작할 때마다 사람들의 감격에 찬 환호성이 이어졌다.


특히 Bring Me To Life의 첫 소절이 시작되는 순간 관객들의 반응은 정말 최고! 역시 이들의 최고 히트곡이 맞다. 마지막곡이 Bring Me To Life가 될 것은 알고 있었기에, 반갑고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리고 드러머 윌 헌트(Will Hunt)의 드럼은 정말 대단했다. 공연 내내 집중을 받은 것은 당연히 홍일점 에이미 리지만, 뒤에서도 정말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앵콜곡은 My Immortal 한 곡이었다. 아마도 예정된 앵콜곡은 두 곡 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미 예정된 두 시간의 공연시간에서 20분이 초과된 상태라 더 부를 수 없었던 것 같다. 아쉽지만, 나도 집에 돌아가는 차가 끊길 시간이었다.

아쉬움보다는 흥분과 감동이었던 멋진 1+1 공연.

굉장히 흥분되고 즐거웠던 공연이었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은 공연이었다. 일단 너무 길어서 흥을 깨버렸던 30분을 훌쩍 넘긴 인터미션, 그리고 그것 때문에 너무 짧고 정신없이 지나버린 에반에센스의 공연, 조금 비싼 티켓에다 홍보가 잘 되지 않았는지 생각보다 적은 관객.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팀의 공연은 좋았다.

인지도가 조금 적었던 부쉬는 그곳을 찾은 모든 관객을 매료시킬 만큼 훌륭한 무대매너와 라이브 솜씨를 뽐냈고, 에반에센스는 그들의 히트곡을 직접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확실히, 헤드폰이나 작은 스피커로 끄적대는 것과 라이브는 가슴에 와 닿는 강도가 전혀 다르니까. 여러분들, 공연을 봐야합니다! 그리고 멋진 공연을 보여준 부쉬에 에반에센스 모두 사랑합니다!




※ 이 글은 싸이뮤직 이 주의 공연 컨텐츠에 게시된 글입니다. 원문은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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