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뮤비부터 링크.




 컨트리 음악 안 좋아하지만 하모니카가 나오는 간주부분은 진짜 신난다. 아니 흥겹다. 파티 장소에 온 것 같아. 실험적을 꾸준히 해온 아웃캐스트였고, 이 노래도 블루지함과 서던 힙합의 흥겨움 + 백인들의 전유물과 같은 컨트리 음악과의 결합으로 상업적으로도 흥하고 평단에서도 찬사를 받았던 노래다. 15년전이나 지금이나 흥겨운 노래였음을 틀림이 없는데, 어릴적 그냥 무슨 공원이름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Rosa Parks라는 제목의 의미를 알고난 뒤로는 썩 즐겁게 들리지만은 않는 노래다. 이래서 사람은 인문학 책을 읽어야돼. 삼십대엔 꼭 그렇게 하겠어.



 Rosa Parks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흑인 인권 운동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위키피디아에서 긁어보자.


Rosa Parks(1913.2.4-2005.10.24)

버스 안의 불평등[편집]

1944년에도 흑인 운동선수 재키 로빈슨이 비슷한 사건으로 제소된 적이 있었다. 또한 10년 전에도 아이린 모건이 비슷한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미국 고등법원에서 승소하였다. 이러한 승리로 각 주를 연결하는 버스에서의 분리 좌석은 철폐되었다. 1955년 3월 2일, 당시 15살 소녀이던 클로뎃 콜빈이 몽고메리에서 백인 남자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수갑이 채워져 체포되어 버스에서 쫒겨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헌법적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앞 네 줄은 백인전용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며 흑인들은 주로 뒤쪽에 있는 그들만의 유색 칸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버스 이용 인구의 약 75%는 흑인들이었다. 이 칸은 고정된 것은 아니고 표시를 옮길 수 있었다. 버스가 다 차기 전에는 중간에도 앉을 수 있었으나 백인들이 탈 경우 양보해야 했으며 버스가 만원이 되면 내려야만 했다. 수년동안 흑인 사회는 이러한 불평등에 대해 불만을 표시해 왔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편집]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하루일을 마친후 로자는 오후 6시쯤 클리블랜드 거리에서 버스를 탔다. 요금을 내고 유색칸으로 표시된 좌석들 중 가장 첫 줄의 빈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정류장을 계속 지나는 동안 앞에 있는 백인 전용칸의 좌석들이 점차 차게 되었고 엠파이어 극장 앞의 세 번째 정거장에서 몇 명의 백인들이 승차하였다. 버스 운전기사인 제임스 F. 블레이크는 두세 명의 백인 승객들이 서 있게 되자 유색 칸의 표시를 로자가 앉은 자리 뒤로 밀어내고 중간에 앉은 네 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나라고 요구하였다. 세 명의 다른 흑인들은 움직였으나 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왜 일어나지 않냐고 묻자, 그녀는 "내가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하였다.

버스운전기사인 블레이크는 경찰을 불러서 로자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몽고메리 시 조례 6장 11절의 분리에 관한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원래 그녀가 앉을 때에는 유색 칸이었으므로 혐의가 풀려 저녁때에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 이 조례는 1900년에 제정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로자 파크스의 친구인 E.D. 닉슨은 앨라배마 주립 대학 교수인 조 안 로빈슨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문의하였다. 그리고 밤을 새워 3만 5천여 장의 버스 보이콧을 선언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또한 여성 정치 위원회(WPC, Women's Political Council)는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12월 4일 일요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각지의 흑인 교회가 동참한다고 발표하였다. 버스 안에서 흑인이 충분히 평등하게 존중되고 흑인 운전사가 고용되며 먼저 탄 사람이 중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기로 하였다. 4일 후에 로자 파크스는 질서를 어지럽힌 행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유죄를 선고 받아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정비용을 물게 되었다. 그녀는 이에 항소하여 무죄와 인종 분리 법에 정식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 5일 월요일, 성공적으로 하루 동안의 보이콧 운동을 마친 후 지온 교회에 모여 향후 전략을 논의하였다. 이 모임에서 "몽고메리 진보 협회"를 만들어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 모임의 회장으로 젊고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덱스터 애비뉴의 침례교회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가 선출되었다.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냐. Rosa Parks의 가사는 그녀의 생애와 별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도, 또 비유적으로 그녀의 삶을 표현한 노래가 아니다. 


Ah ha, hush that fuss
Everybody move to the back of the bus
Do you want to bump and slump with us
We the type of people make the club get crunk


이게 가사인데.. 대충 의역해보자면, '버스 뒤로 가서 우리랑 같이 뛰고 즐기자. 우리는 이 클럽을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야.' 뭐 이런 가사. 후렴구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가사가 다 이런 류의 내용들이다. 그래서 Rosa Parks 재단 쪽은 이를 문제 삼아서 이들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LaFace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유는 이름의 상업적인 무단도용, 그리고 노래 속의 저속한 언어들 때문이었다. 결과는 아웃캐스트 쪽이 승소했다. 아웃캐스트는 그녀를 존중하지 않았거나, 음해할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 제목을 그녀의 이름으로 무단 도용한 것에 대해 위약금을 청구하는 수준에서 끝이 났다. 

 

적으로는 아웃캐스트쪽이 승소했고, 그들의 노래도 엄청 흥행을 했지만, 그리고 그들이 Rosa Parks를 Respect하지 않았다고 생각진 않지만, 아직도 굳이 Rosa Parks란 이름으로 노래를 발매했어야 했나 하는 의구심은 든다. 아무튼 왠지 모를 찝찝함에 몇년동안 잘 안듣던 앨범이었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들으니까 좋긴 좋더라.






Outkast - Aquemini(1998)


'음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Quiet Storm 이야기  (2) 2014.02.12
2014.02.04 음악잡담.  (0) 2014.02.04
휘성이야기(2).  (6) 2013.12.09
D'angelo - Feel Like Makin' Love  (0) 2013.11.12
Feeling Good 이야기  (0) 2012.09.0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