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회 서울 연극제에 100인의 관객평가단으로 참여했다. 창작극과 번안극으로 이루어진 쟁쟁한 10작품이 출품되었고, 나는 6작품을 관람하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더 많이 보고 싶었지만, 6개 보는 것도 죽을뻔 했다. 왜 항상 이런걸 신청한 시기는 바쁘거나 아픈걸까. 어쨌든 여섯작품의 간단한 후기.


1. 극단 그린피그 <공포>

 안톤 체홉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작품. 분명 지금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작품인데, 체홉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성공적인 오마주 작품이었다. 체홉스러운 작품답게 보기 편한 연극은 아니었지만, 일상에 스며든 공포들이 다양한 인간군상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었다. 특히나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면서도 위선적이었던 농장 주인 내외가 가장 와닿았고, 뒤늦게나마 자신의 죄를 터놓았던 조시마 신부의 대사들이 인상깊었다차분함을 유지하다 폭발하던 체홉역의 이상홍 배우님의 연기도 좋았다. 특히나 성경구절과 함께 토해지듯 쏟아지던 대사들을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되었다. 때로는 찔렸고, 때로는 아팠다. 특히나 무대가 너무 예뻤다. 스러져가듯 기울어져있는 나무들이 마치 등장인물처럼 위태롭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배우들의 의상도 그 시절의 의상처럼 자연스러웠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리역의 김수안 배우님이 정말 예뻤다...


2. 프로젝트 아일랜드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체코의 작가인 뻬뜨르 젤렌카의 작품을 번안한 번안극. 영화로도 나와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관객 평가단 평가에서 별 다섯개를 주었던 작품. 실제로 만점인 작품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39회 서울연극제의 대상작품이기도 했다. 사실 이 날 낮부터 회식 비스무리한 것을 하느라 술을 먹고.. 마지막엔 양꼬치집에 있다가 나왔는데.. 다행히 한쪽 구석자리이긴 했지만 진짜 옆사람한테 너무너무 미안하더라. 내 옆자리 사람이 술먹고 왔으면 속으로 오만 욕을 다했을텐데.. 어쨌든 담배를 물고 무심한 표정으로 옆집 사람들의 행위(?)와 친구의 행위(?)와 부모님을 대하던 남동진 배우님의 연기가 너무나 머릿속에 강하게 와 닿았다. 독특했지만 일상적이었고, 평범했지만 미친사람들이었다. 그런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전혀 거북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감에 씁쓸해졌을 정도로.. 내용도, 연기도 좋았다. 기회가 되면 영화도 보고 싶어졌다.


3. 연극집단 반 <이혈>

 화려하게 꾸며놓은 조명과 무대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촌스럽던 연출과 연기. 90년대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내러티브가 부족해서 주요 인물들의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극단적이었을 뿐...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과장되어서 가끔씩 터져나오는 실소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무대 곳곳이 잘 활용되었고, 조명을 너무 잘 써서 감각적인 무대를 만드려는 노력은 느껴졌다. 웹툰작가가 주인공인 연극이라서 그런지 무대와 연기에서 만화적 질감도 느껴졌다. 그래서 "씬시티"가 머릿속을 스치고 가기도 했지만, 그런 섬세한 무대마저도 그저 과하고 촌스럽게 느껴질 연기와 연출이었다. 


4. 창작집단 상상두목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

 그 슬펐던 상황과 전혀 관계 없던, 아니 관심없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가 이야기의 포인트였다. 영화 택시운전사나 1987이 떠오르는 시놉시스인데, 주인공들이 극적으로 바뀌는 순간의 쾌감이 있는 영화라면, 이 작품은 끝까지 사건과는 거리를 두었다. 자신만의 이익을 쫓던 얼간이 같은 세 주인공은 결국 사건의 한 가운데 있게 되었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 덜 무거웠지만 오히려 일상조차 무너져버리고 부당하게 당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나름대로의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좋은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일단 초중반이 지루하다. 세 명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캐릭터 쇼가 되어야 하는데, 잘 살지 못했던 것 같다. 둘째로 민주화운동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장면. 그냥 세 명의 주인공 위주로 끝까지 끌고가는게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다. 


5. 극단 하땅세 <그 때, 변홍례>

 재밌었고, 아쉬움도 많이 남았던 작품. 후시녹음을 하던 그 당시 영화의 질감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잘 살려서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직접 녹음을 하고 입모양만 따라하기도 했고, 변사도 있었으며, 효과음은 무대 한쪽에서 직접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흰 배경에 나타나는 그림자를 잘 활용했다는 점. 그림자에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나 정서를 부각시켜 실제 등장인물의 감정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대에 가득차있는 장난질이 그렇게 좋았다. 내 스타일 ㅋㅋ 다만 변홍례라는 인물이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려주지 못한 느낌. 연출에 묻혀버렸지만 홍례가 무엇때문에, 왜 그랬는지를 모르겠어. 이것조차 그 당시 B급 영화들의 느낌을 낸거라면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래도 난 좀 아쉬웠다. 실제 신문에 나온 사건을 모티브로 했는데, 연출역을 맡은 배우가 몇 번이나 "우리는 연극을 하는거니까"와 같은 대사를 뱉었다. 일부러 거리를 조금 두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작가, 혹은 연출가가 실제 사건을 다루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원작 대본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6. 극단 피악 <오를라>

 컨디션이 매우 안좋았던 날 보았던 연극. 게다가 1인극이라니 ㅋㅋㅋ 보통은 "저 사람은 왜 미쳤을까?"를 풀어내는 것에 집중한다면, 이 작품은 "사람이 미쳐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어떻게 미쳐가는가"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정상이던 사람이 미쳐서 미친짓을 할 때까지를 그려냈다. 특히나 벗어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딱 보면 알지만 그냥 어려운 작품. 그래도 그 안좋은 컨디션으로 봤는데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한윤춘 배우님이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풍겼기 때문인 것 같다. 



 연극 보러 가는 날마다 내가 이걸 왜 신청해서 이 바쁘고 힘들때 이 고생인가..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또 신청하고 싶다. 좋은 작품들이었고, 즐거웠다. 

 

무대소품이라고는 밥상하나가 끝이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두 배우가 뿜어낸 열정과 열기만으로 극장 전체가 가득찼던 멋있는 작품이었다. 연극은 아들의 시선에서 진행되었고, 특별한 서사나 드라마 없이 전개되었다. 사실 '가족'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눈물샘 반쯤은 이미 차오르는 주제아닌가? 사실 그래서 가족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건 좀 사기야. 얘기가 구질구질하고 신파로 흘러가도 가족 이야기만은 참기가 힘들어. 게다가 기구한 가족사야 현실에서도 차고 넘치고 우리집도 평탄하지 않은데 남의 가족사까지 보면서 울고 싶진 않거든.

 그래도 연극은 비교적 차분한 톤을 유지했다. 중간까지 보통의 부자관계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하지만 외면해왔던 부자가 서로 닮아있음을 알아가는 모습, '무(無)라'가 '(밥) 무라'가 되어 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나에게는 특별했다. 10년전쯤 아버지와 백석과 유재하의 이야기를 하며 단 둘이 함께 먹던 냉면 한그릇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절반도 채 차지 않은 관객석 곳곳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뜨듯미지근하게 유지된 톤 덕에 마지막에 이어졌던, 조금은 억지스럽고 조금은 신파스러웠던 아버지의 대사마저도 뜨겁게 와닿았다.

 

 무엇보다 김홍파, 서동갑, 두 배우의 열연은 아직도 가슴에 많이 남아있다. 어떤 극 보다도 평범한 대사속에 많은 마음들과 심경의 변화를 담고 있어야 했다. 절대로 먼저 뜨거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글펐다. 그리고 그 정서를 조금씩 더 알게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나는 돈 욕심이 큰 편은 아니고, 그냥 가진만큼 쓰면 된다 주의기는 한데, 가끔 그 수위를 넘나들 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더 좋은 오디오를 봤을 때, 조금 더 좋은 헤드폰을 봤을 때, 조금 더 좋은 렌즈를 봤을 때 ㅎㅎㅎ 현재 가장 이슈가 되는 키워드가 뭐냐...면 그것은 금수저 흙수저. 사실 시작점이 다른 것은 자유경제체제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것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되어 간다는게 문제다. 뭐, 이렇게 말하면 너는 언제 한번이라도 뜨겁게 노력해보았느냐,라고 입에 거품물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분법으로 불가능해!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분명 차이가 크다. 돈이 권력이고 돈이 신분이야....

 

 오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물 위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는 물 위에서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물 밑에서 부지런히 발을 구르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SNS에서는 누구나 참 잘 먹고, 잘 살고, 또 멋있다. 하지만 쿨하고 멋있어 보이는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어떨까. 삶도, 사랑도 가까이서 보면 다 찌질하다. 쿨함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힘들고, 어렵고, 또 외롭다. SNS에서 시작되는 나와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은 때로는 그들의 추악한 면을 부각시켜 노골적인 분노로 표출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연민으로 표출되기도 하며, 밥을 굶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인스타그램을 하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하기도 한다. 일종의 콤플렉스...인거지.

 

 이 작품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욕망들에서 시작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한다. 하녀들은 작품속에서 마드모아젤과 하녀로 분하여 끊임없이 역할극을 한다. 그 안에는 그들의 욕망들이 뒤섞여 있고, 자기 비하와 연민까지 스며들어있다. 그리고 그들이 연기하는 마드모아젤은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척하는) 마드모아젤의 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뒤엉켜 있는 것은 그들의 역할극이 아니라 아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욕망덩어리들..이었던 것 같다.

 

 애초에 희곡은 마드모아젤이 아니라 굉장히 독한 마담이 등장했었다고 한다. 아마 그랬다면 연극은 좀 더 날 선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을 것 같은데.. 이 희곡속의 마드모아젤은 그렇지 않았다. 아름답고 순수(?)한 마드모아젤의 모습 때문에 하녀들의 모습이 더욱 초라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특히, 마드모아젤의 독살에 실패한 하녀 끌레르가 이미 나가버린 마드모아젤의 등 뒤에서 '마드모아젤은 아름다우세요.'라는 식의 대사를 읊조릴 때는 꽤나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다.

 

 현대극이 아닌지라 대사 자체가 조금 오글거리기는 했지만, 세 사람의 연기는 충분히 좋았고,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던 좋은 연극이었다. 공연기간도 짧고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스무명 남짓되는 사람 밖에 없었다는게 아쉬웠다.

 

 

 

 추리극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보통의 추리극은 치밀한 플롯과 떡밥과 맥거핀들 사이에서 머리를 사정없이 굴리다가 모든게 맞아 떨어질 때 느껴지는 쾌감이 가장 큰 즐거움인데.. 이 연극은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장면을 보여주고, 그 장면에 대해 궁금증을 유발하고 관객은 직접 질문하고 배우들은 진술을 하며 형사와 관객이 함께 추리를 해나간다. 배우 네명이 모두 범인이 될 수 있는 용의자들이고, 모두 수상한 정황들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네 명의 용의자가 범인이 될 수 있는 네 가지 결말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배우들이 던지는 수많은 떡밥이 모두 맥거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보통의 추리극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점은 주어진 정보가 굉장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용의자가 정황증거 밖에 없다. 어느쪽으로도 결말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해 플롯이 그만큼 엉성하고 허술하다는 것이고, 그 허술한 플롯은 마지막게 결말이 나왔을 때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복기해볼 필요도, 그런 여지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론이 거의 범인의 '진술'에 의해 나왔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결론을 위한 추리극이 아니라 '과정'을 위한 추리극에 가깝다. 마치 직접 형사, 또는 증인이 되어 수사에 참여하는 것 같은 기분, 요즘 유행하는 방탈출 게임과 같은 매력을 이 연극에서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연극의 중반부부터는 계속해서 배우들과 소통하며 연극에 참여하는, 소극장 연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을 극대화시킨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확실히 배우들의 순발력이 굉장히 중요한데,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고 그 때 그 때 관객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배우들의 순발력이 좋았다. 연극 자체가 배우들도 많이 타고, 특히 배우들의 경험을 많이 탈 것 같다. 새 시즌이 시작되었을 때, 초반부보다 후반부 연극을 보는 것이 확실히 더 좋을 것 같다. 시종일관 웃으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연극임에는 틀림없는듯. 전 날 출장 다녀와서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졸릴 틈 없이 몰입해서 봤다. 그리고 다양한 결말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결말도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물론 난 안봐 ㅋㅋㅋ 결말이 중요한 연극이 아니니까 ㅋㅋㅋ 어떤 결말이 되었든 덜 닦고 화장실 나서는 것 같은 찝찝함이 그대로 남아 있을거니까...ㅎㅎ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원치않다면 뒤로가기 클릭.

 

 

 

 

 

 

 살인의 추억과 비슷한 모티브에서 시작했지만, 살인의 추억이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라는 컨셉에서 시작했다면, 이 연극은 '그놈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를 컨셉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묵직한 한방이 있었다.

 연극은 과거의 시점에서 시작하지만, 현재와 과거를 반복해서 오가면서 진행된다. 영화였다면 30여년이나 차이가 나는 과거와 현재는 배경만 봐도 그 경계가 뚜렷했을 텐데, 연극의 특성상 기껏해야 대사에서 그 차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툭 던진 작은 대사에서 배경이 달라졌다는 암시가 있었지만 흘리기 쉬웠고, 과거로 다시 돌아갔다가 다시 현재시점이 나왔을 때에서야 두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연극의 특성이 이 연극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최대한 뒤로 미룰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 한 방이 더 묵직했던 것 같았고.

 하지만 연극이기 때문에 아쉬움도 있었다. 플롯들을 조금 더 차곡차곡 쌓아갔어야 하는데, 플롯이 겹겹이 쌓아지 못하고 단순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배경이나 장면 전환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플롯도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남아 있었고.

 

 연극의 빈 공간과 무거운 주제를 다양한 캐릭터들로 굉장히 영리하게 채웠다. 매력있는 캐릭터가 많았고, 그 캐릭터를 두 명의 멀티맨들이 채웠다. 덕분에 연극이 지루하지 않고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는 효과를 얻었는데, 그래서 연극이 꽤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연극이 끝나고 나올 때 사람들이 결말을 조금 어려워하는 것 같더라. 친절하지 않은 연극이긴 하다.

 

 제목과 내용이 좀 쌈마이 느낌이라 땡기진 않았지만.. 모이공 공연이었던 <공간>이 꽤 좋았던 것이 기억나서 이번에도 다시 찾았다. 막공이라 사람도 꽤 많더라. 배경이 수시로 바뀌고 많은 역할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무대 세트의 이동과 동선을 짜기 꽤 어려웠겠다 느꼈다. 그래도 바퀴 달린 가림막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잘 채워졌다. 길상역의 김명섭님은 전에 공연도 그렇고 오늘 공연도 그렇고 참 다재다능하다고 느꼈다.

 상하이 박으로 오해받아 들어갔던 길상의 이야기는.. 어쩌면 시대의 '영웅'을 찾고 있었던 그 시대의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영웅의 영웅담과 희생이 독립의 도화선과 같은 역할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겠지. 글쎄.. 요즈음에 이 이야기를 대입해보면 어떨까 잠깐 고민을 해보았다.


 오랜만에 봤던 연극이라 시작전에 굉장히 설렜던 느낌이 있다. 그리고 문득 들었던 생각인데.. 잘 갖추어진 공연장에서 화려한 조명기구와 깔끔하게 차려진 무대 디자인을 배경으로 잘 만들어진 연극도 좋지만.. 적당히 허술한 곳이라도 배우와 연출가의 땀과 노력이 배어나는 공연들이 참 좋다. 멋있다.

 





 제목을 보고서 살짝 걱정도 했지만, 그래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연극인 것 같아 신청했다. 이 연극은 창작극이고 거의 초연이라고 한다. 창작극에 대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본 것 같았다. 고전을 재해석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문학을 비롯한 문화예술의 가치가 보편성에도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창작극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안에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연출 방식도 마찬가지고 연극이 던져주는 메세지도 그렇고. 


 물론 이 연극이 지금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특수성을 잘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사회에 이슈가 되는 병폐들을 그려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은 특수한 개인을 나타내기 보다는,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예를 들어 고시생(백수)를 의미하는 인물, 사업에 실패한 가장, 외모에 치중하는 20대 '처녀', 평범한 회사원 등.. 그리고 각각의 인물은 보편적인 모습보다 집단의 특수함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치중한다. 인물의 인격은 좀 부조리하다고 느껴졌지만, 그런 극단적인 모습들이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냈고, 실소를 불러일으킨다. 현대사회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순응하고 안도하는 집단의 광기도 확인한 것 같았고,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면서 상대적으로 현실 관계에 무감각해지는 태도,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분노와 이중적인 태도를 볼 수 있었다. 누구나가 싸이코패쓰다.


 다만 아쉬운 것은 추리극의 형태를 띄고 있던 초반을 지나, 개개인의 실체를 드러내는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플롯이 좀 정형화된 플롯이라고 해야하나... 물론 초반부 추리극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는 하지만, 추리가 주가 되는 연극은 아니긴 하다. 그래서 그냥 추리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클리셰를 그대로 차용하려고 생각했을지도.. 대신 작가나 연출가는 이야기보다 캐릭터에 더 집중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캐릭터가 드러나는 과정이 많이 늘어진다고 느꼈던 것 같다. 숨가쁘다고 했는데, 별로 숨가쁘지 않았어.. 게다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캐릭터 조차 클리셰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아서.. 뭐 사실 없는 병폐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표현 방식을 달리 할 수는 없었을까...라고 창작 한 번 안해본 새X가 그냥 쉽게 지껄여봅니다ㅋㅋㅋㅋㅋ 내가 쓰는 글이 다 그렇지 뭐... 어쨌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왕 극단적으로 갈거면 좀 더 특이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대부분의 배우분들의 연기가 자연스러워서 감탄하고 나왔다. 배우분들의 내공들을 느낄 수 있었음. 특히 배우들의 합이 참 잘 맞는다고 느껴졌음. 반면에 연출적인 부분에서는 딱히 도드라지는 구석은 없다고 느껴졌다.





 창작산실에서 지원하는 여러 창작극 중의 하나다. 전에 <하나코>도 그랬고, 이 작품도 그랬다. 미스테리 극이고, 시놉시스를 봤을 때 굉장히 매력적일 것이라 예상했다.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떠도는 땅>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미스터노 이다. 미스터 노는 아버지의 장례식 마치고 아버지의 땅을 팔아 빚을 갚으려한다. 하룻밤만 지나면 다 끝날 줄 알았던 미스터 노는 온갖 인물과 사건에 떠밀리기 시작한다. 미쎄스노와 김대리의 불륜, 회사 부도로 인한 수만 마리 닭의 떼죽음, 연쇄살인범의 알 수 없는 종적, 생활고에 시달려 첫사랑과의 기억을 값나가는 유물로 바꾸려는 영지,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노영감의 귀신 등 이 불길하고 모호한 기운은 온갖 공격에 무방비상태가 된 미스터 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연극은 확실히 미스테리하게 진행되었다. 미스테리한 이야기를 풀어가거나 추리극과는 거리가 좀 있었고, 굉장히 이미지가 쎈 스릴러를 보는 듯 했다. 닭(정확히는 닭 잡는 모습), 비닐, 영안, 무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캐리어 등 기본적으로 굉장히 쎈 이미지를 주는 소품들부터 공포,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진동 저음, 미스테리한 느낌을 주는 에코 음향까지.. 연출자가 어떤 것을 하고 싶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세로길이, 그러니까 업스테이지부터 다운스테이지까지 거리를 가로길이보다 훨씬 더 길게 잡고, 무대 배치를 좌우 대칭이 되면서 가운데 소실점을 갖도록 설정했는데, 이로인해 무대가 굉장히 깊은 공간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대 배치가 연극 연출에 굉장히 비범하게 쓰였다고 느꼈다. 관객석까지 내려온 좌우대칭의 나무 소품은 관객석에 앉은 관객들을 무대 위로 올려놓고 관찰하게 하는 듯 했고, 깊게 느껴지는 무대배치는 상대적으로 아득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치 일자로 뻗어있는 메타세콰이어길에 자욱한 밤안개가 끼어있는 기분. 아득해서 잘 안보이니까 확실히 으스스한 느낌을 받는다.


 문제는 부분부분의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메시지는 상당부분 옅어졌다는 점.. 흐름을 갖는 '개연성'보다는 어떤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이 이미지와 메시지가 연결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 연극이 끝나고 남아있는 강렬한 이미지들에 비해서, 연출자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좀 힘들어서 프로그램북을 구입했는데... 이건 뭐... 연출자 겸 작가는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들을 장례식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마구 쑤셔넣은 것 같았다... 현대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 넣고 싶다보니까 어느 하나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걸쳐있는 느낌이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했고, 어떻게 표현했다...라는 과정이 프로그램북에 나와있지만 그것을 봐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그냥 자극적인 이미지들만 남아있을 뿐, 그 이미지들이 갖는 상징성은 좀 약하지 않았나?? 다시 연극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프로그램북은 음.... 예술영화 한 편 보고 매우 과하게, 비약적이고 과시적으로 해석해 놓은 블로거의 글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자기에 취해 희곡을 쓴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어쨌거나 무대구성은 독특했고, 영화로 치면 좀 뻔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연극 무대로 옮겨놓고, 관객들에게 색다른 체험(?)을 안겨준 것은 확실히 신선했다.


 


 

 

 

 

 이 연극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꼈지만 연극은 진짜 재밌다. 타의 반으로 시작하게 된 연극반이지만, 그래도 나름 잘 시작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특히 이 연극처럼 조금 독특한 작품들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영화를 훨씬 좋아했었는데, 요즘은 연극도 영화만큼 좋다. 망했어.... 흑인음악 동아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 연극은 연극과 근대미술, 퍼포먼스, 미디어아트, 설치미술이 혼재되어있다. 연극은 두 배우가 번갈아가면서 모노드라마 처럼 진행되는데, 길고 긴 대사들과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전위적인 퍼포먼스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온다. 무엇보다 여배우이자 몸으로 하는 퍼포머(?)인듯 보이는 조아라씨의 연기가 꽤 매력있었다. 대사가 많다 보니 가끔 버벅이기도 했지만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발음이나 발성도 훌륭해서 보고 있으니 자꾸 빠져들게 되더라. 연극 특유의 과도한 어조들도 이렇게만 한다면야 뭐..ㅎㅎ 풀메이크업을 하고 <여배우의 혼 속편>에서 나온 모습을 보고는 하나도 예쁘지 않았던 그 여배우가 예뻐보이기까지 했다. 화장의 힘인가.. 아니, 그것보다는 배우 특유의 매력에 매료된 것 같았다. 보는내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만큼 매력적이었다.

 

 같이 연기를 했던 와카야마 역의 이상홍씨는 시각예술가이자 배우였는데, 전문배우가 아니라서 그런지 연기나 발음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능청스러웠다. 특히 두 배우가 주고 받던 대사들은 굉장히 유쾌했다. 그리고 무대위에 설치한 미디어아트와 설치미술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고 하니, 이 연극에는 와카야마 역의 배우 뿐 아니라, 배우이자 예술가인 '이상홍'이란 사람 자체가 녹아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여배우의 혼 속편>은 전편의 3/4 정도만 다루고 있다고 했는데, 마무리가 좀 찝찝하긴 했지만, 앞부분이 충분이 매력적이었던지라.. 이런 모노드라마는 확실히 입을 잘 털어야 한다. 대사들을 찰지게 만들고, 내 이야기인듯 자연스럽게 잘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나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이렇게 입 잘 터는 영화들이 내 취향이었듯, 이 연극도 꽤나 그런 맛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예술가로 살아도 좋으니 일본에서만 태어나지 말게 해달라.'는 대사나 아우라를 설파하던 코야마의 대사들, 몸에 흰 물감을 칠하면서 둘이 나누던 예술에 대한 대화들은 발랄했고 인상적이었다. 무대 디자인과 조명도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무대를 반으로 쪼개서 사후세계와 현세를 표현한 것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많은 조명들을 촘촘하게 사용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자이니치>로 좋은 인상을 받았던 극단 후암의 또 다른 작품 <칸사이 주먹>을 보고 왔다. 생각할 만한 것들을 던져주는 좋은 작품들을 올리는 것 같다. <자이니치>는 연극이 끝나고 정말 많이 먹먹했고, <칸사이 주먹> 역시 떠오르는 것들이 이것저것 있었다. 역사와 국가 같은 떠올릴 때마다 인상부터 찌뿌려지는 저 단어들과 국가 앞의 개인과 돈까지.. 개인적으로는 역사와 국가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김질 해볼 수 있는 계기였다. 자꾸 이상한 쪽에서 저 단어들이 쓰이다보니까 이미 머릿속에 너무 왜곡 되어버린 것 같았어.


 하지만 연극은 좀 아쉽긴 했다. 거의 대부분이 일본어로 되어있었고, 약간의 중국어와 러시아어로 극이 진행되었고, 그래서 자막이 있었는데, 좀 많이 불편하고 산만하게 느껴졌다. 자막 위치가 위에 있어서 그런지 한 눈에 화면이 안들어와서.. 극이 산만하게 느껴진건 단지 자막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누가 들어도 어색하게 느껴진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발음들도 꽤 거슬렸고, 흐름자체가 방황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좋은 소재고, 연출의도도 충분히 알겠는데, 그게 매끄럽게 표현되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좁고 비루하기 짝이없는 소극장이었다. 조명도 적었고, 등장하는 문도 하나밖에 없더라. 극에서는 배우들의 입장과 퇴장이 굉장히 많았는데, 무대 왼쪽에 선을 그어두고 배우들을 관객에게 그대로 노출하며 배우들이 직접 입과 악기들을 이용해 음향효과를 내게 했던 것은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고 느꼈다. 덕분에 입장과 퇴장도 꽤 자연스러웠고.. 자이니치 때도 연기가 아쉬운 배우가 몇명 있기는 했는데, 이 연극도 몇몇 배우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어떤 배우는 중국어로 하다가 갑자기 한국말로 대사를 하니 갑자기 어색해지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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