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스

하얗게 불태운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 공연

늦은 오후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급하게 먹은 점심이 체한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유난히 피곤했던 일주일이었기에 다크서클은 이미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마 공연장 안에서 내가 제일 피곤해 보였으리라. 

여름을 페스티벌 하나 못 가고 이대로 보낼 순 없다며 벼르고 별렀던 공연이었는데... '이대로 뛸 수 있을까?' 공연장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지 멀쩡한 남자가 혼자 와서 미친 듯이 뛰다가 앞사람 등에 토악질을 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머리에 스쳤다. 이 상태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뇌를 하얗게 불태워버린 공연

공연이 펼쳐지는 홍대 V홀에 공연 시작 30여분 전 도착해서 표를 받아들었다. 600번대. 보나마나 마지막 입장이다. 올라가서 바람이라도 더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계단에서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던 백 여명 정도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자였던 것 같다. 메스꺼운 속을 붙잡고 올라가던 그 와중에도 부러웠다. 짜식들. 잘 나가는구나. 밖에서 크게 한 숨 들이켜고 맘을 다 잡으며 공연 5분 전에 내려와 입장했다. 이미 공연장 안은 600명 가까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설렘과 흥분,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윽고,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상영하고 있었던 듯한 스크린에는 The Koxx를 소개하는 짧은 영상이 소개되었다.


"글래스톤베리에 보낼 유일한 한국 그룹!"과 같은 자기 자랑 식의 약간은 오그라드는 영상이 끝나고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그들이 등장했다. 망설임 없이 시작된 그들의 첫 곡 'XXOK'. 왼쪽 귀와 오른쪽 귀가 뚫려서 연결되어 버릴 것 같은 환호성, 공연장 천장을 뚫을 듯한 기세로 뻗어 올린 손, 신나는 기타와 파워풀한 드럼, 귓 고막을 자극하는 전자음, 격렬한 헤드뱅잉, 그리고 온 몸에 소름을 돋게하는 떼창까지. 소화가 되지 않아 울렁거리던 속은 이내 흥분과 설렘으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2시간의 유체이탈을 경험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공연은 끝나 있었다. 5분 전까지 신나게 뛰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기어 올라가듯 겨우겨우 계단을 올라와 모자란 당분을 꿀물로 채우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하얗게 불태웠다며, 목표를 완벽하게 클리어 했다며 기뻐하는 도중에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공연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미친 듯이 뛰고 놀고 소리 지르느라 리뷰를 써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뇌까지 하얗게 불태웠나보다. 글을 쓸 생각에 가슴이 갑갑해왔지만, 이 날의 공연은 그만큼 열광적이고 열정적인 공연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신형엔진

공연을 본지 3일이나 되었건만 아직도 가시지 않은 통증으로 뒷목을 부여잡고 칵스의 1집과 EP를 무한 재생하며 그날의 조각난 기억을 하나씩 되새김질 해본다. 'XXOK'로 시작된 공연의 오프닝을 연달아서 1집 수록곡들인 'City Without a Star'와 'Fire Fox'로 이어졌다. 시작부터 혼을 쏙 빼놓는다. 칵스의 공연은 예열이 없다. 엔진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속력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레이싱 대회처럼 처음부터 최대 출력으로 달린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엔진에 무리가 가더라도 말이다.(오늘 공연도 공연 말미에 일부 멤버가 산소호흡기로 충전을 해야 할 만큼 엔진에 무리가 갔다. 평균나이 22.5세의 신형 엔진도 소용없을 정도의 질주였다.) 

연달아 세 곡을 달리고 나서야 그들의 첫 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준비해온 멘트를 하다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첫 앨범, 그리고 제대로 준비한 단독 공연과 꽉 찬 객석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지도 못한 채, "감사합니다. 재밌게 놀다가세요!"라는 말과 함께 'Dreamer'와 'Refuse'가 연주 되었다. 댄서블한 리듬이 넘실대는 연주에 정신없이 쏘아대는 레이저, 간간히 터지는 싸이키 조명, 공연은 점점 더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드러머 샤론의 드럼 솔로가 있었는데, 빠른 속도에서 조금씩 느려지다 드럼에 머리를 쿵 박고,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어찌 끝날까 살짝 걱정도 됐는데, 시선과 호응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A Fool Moon Night'로 이어졌다. 보면서 이들은 이제 정말 '루키'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어서 '12:00'와 '술래잡기'가 이어졌는데, '12:00'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앨범에서 꽤 좋게 들었지만 무작정 신나는 댄서블함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아 라이브에서는 아쉽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한글로 쓰여진,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봤을 그 멜로디는 라이브에서 함께 부를 때 더 빛을 발했다. 


남성다운 임팩트의 후렴구가 돋보였던 'T,O.R.I'에 이어 '얼음땡'에서는 숀과 수륜까지 함께한 드럼 합동 연주 퍼포먼스가 재밌었고, 공연은 'ACDC'와 'Jump To The Light'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공연이 시작하고 한 시간이 넘게 지났지만 전혀 지친 기색 없이 달리는 이들의 연주에 나도, 혼자 온 옆의 남자도, 뒤에서 날 자꾸 밀치던 여자도, 앞에서 내 발을 계속 밟아대던 여자도 지칠 줄 모르고 손을 높이 뻗고 함께 뛰고 있었다. 이 곳이 바로 아픈 줄 모르고 뛰는 지옥불 속이요, 열정의 끝판왕이었다. "No one can control my R! P! M!" 그래, 달리는 걸로는 늬들이 짱이다.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마지막 곡이란다. 

앨범에서 가장 라이브로 듣고 싶었던 'Oriental Girl'. 동양적 선율과 독특한 악센트가 인상적인 발음, 댄서블한 리듬, 그리고 중간에 템포가 한번 바뀌면서 빠른 BPM으로 가장 춤추기 좋고 신날 것 같았던, 집에서 음악 들으며 가장 날 들썩거리게 했던 그 곡. 마지막답게 유난히 큰 목소리로 질러대던 떼창과 더불어 밀고 밀리고 밟고 밟히고 뛰고 춤추고 하여간 집에서 하지 못했던 것들 그곳에서 원 없이 할 수 있었다. 

앵콜곡으로는 세 곡이 이어졌는데, 1집 마지막 곡이었던, 'The Words'를 여자보컬과 함께 몽환적이고 차분하게 들려주고는 EP 수록곡인 'Trouble Maker'와 'Over and Over'로 칵스 답게 마무리하였다. 특히 이 날의 마지막 곡 ‘Over and Over’를 연주할 땐 바닥날 것 같은 체력을 붙잡고, 난 이 날을 위해서 그동안 출퇴근을 자전거로 하며 체력을 길러왔던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끝까지 Over and over!를 함께 외쳤다. 후회없이. 화끈하게. 늘 흐리고 비 내리던 우울한 여름을, 꽉 막혀 답답하던 그 속을 온 몸에 흘러내리던 땀과 함께 조금도 남기지 않고 전부 배설한 기분이었다. 


그대들이 최고다. 칵스!

칵스의 보컬 현송은 공연 내내 "너네들 진짜 많이 늘었다. 정말 잘한다!"라는 말이 듣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이제 어리고 갓 데뷔한 애송이들이 아니다. 관객을 휘어잡는 노련미와 젊음의 패기를 모두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 넘치는 밴드다. 농담 반 진담 반 이겠지만 과감하게 세계 제패가 목표란다. 적어도 그 날 그 공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열정과 그 기운이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일단 확실한 건 500명은 무조건 제압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 섬머소닉을 비롯해 싱가폴, 태국, 중국, 호주, 프랑스 등 다수의 해외 공연과 러브콜들이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발표한 첫 정규 앨범을 통해 외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방향성이 제대로 먹히고 있는 증거 아닐까. 아무리 The Foals나 Two Door Cinema Club과 비교가 되어도 어떤가. 내가 볼 땐 뒤에서 그들을 모방하고 쫓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글래스톤베리에 보낼 유일한 밴드라는 말, 아직은 이 글에 나온 호들갑보다 더한 오버라는 거 알고 있다. 그래도 좋다. 난 이들의 세계 제패를 응원하련다. 

※ 이 글은 2011년 9월, 싸이월드 뮤직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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