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R&B 음반이 많이 나와도 되나 싶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말이다. 한국형 R&B라는 요상한 장르로 탈바꿈하여 발라드 음악에 화려한 꺾기 신공을 장착한 음악이 대세였던 때는 있지만, 그때도 진짜 본토 쀨 나는 R&B음악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비주류였고. 그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렇게 숨어지내던 R&B 뮤지션들이 재조명받고 차트 순위에 올라있는 것을 보니 흑덕으로서 감개무량하다. 


 얼마전에 ize에서 강명석 편집장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이돌 음악에 스며들어 있는 힙합 문화에 대한 글이었다. 바람직하게도 우리는 아이돌에게도 음악적으로 어떤 캐릭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힙합을 비롯한 흑인 음악이 그 속에 적절히 융화되어 있다. 블락비나 방탄소년단의 언더 출신 래퍼들, 빅뱅의 GD와 태양을 말할 것도 없고, JYP, SM 출신 아이돌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감지할 수 있는 음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는 아이돌도 그렇지만, 진보나 디즈, 태완 같은 R&B뮤지션들은 꾸준히 그들에게 곡을 제공해 왔다. 이번에 발매된 태민의 앨범에서도 디즈느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지.


강명석님의 글 : http://www.ize.co.kr/articleView.html?no=2014090102367212994&aType=i1106&page=1



태민 - ACE   디즈가 작곡, 편곡에 참여한 슬로우잼 스타일의 노래. 잘 빠졌다. 다시 한번 묻지만 디즈느님 새 앨범 안내요?ㅜㅜ


어쨌거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흑인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이 활동하기에 참 좋은 시류가 형성되어 있다. 덕분에 음지(?)에서 프로듀싱만하며 지내던 많은 R&B뮤지션들이 양지로 올라왔다. 올 여름에 나온 음반들만 한 번 정리해보자.




1. 크러쉬 - <Crush On You>





 크러쉬는 예전에 자이언티 1집 리뷰쓰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다. "뻔한 멜로디"에서 피쳐링으로 참여했는데, 자이언티의 리듬감과 비교하면서 살짝 디스아닌 디스를 하게 되었는데, 사실 리듬감 자체만 놓고 보면 워낙 자이언티가 독특해서 그렇지 크러쉬의 리듬감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건 좀 구차한 변명이고 ㅋㅋㅋㅋ 어쨌거나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앨범을 들었는데, 와.. 크러쉬 미안 ㅋㅋㅋㅋㅋㅋ 전곡을 프로듀싱했는데, 흑인 음악이 생활인양 너무 자연스럽다. 음악, 보컬, 여러 장르들 가리지 않고 자연스러워. 


 일단 너무 많이 이야기가 나왔지만 얘기 안할 수 없는 곡이 자이언티가 피쳐링한 "Hey Baby"인데, 목소리를 겹겹히 쌓아 만든 도입부 보컬부터 찌릿하더니 타격감(?) 넘치는 드럼비트 나오자마자 눈물 질질 ㅜㅜㅜ '뿡칭땅뿡칭뿡땅칭'하는 비트박스가 매우 거슬리긴 하는데(비트와 베이스 음을 같이 낼 때는 베이스 음이 드럼비트의 입모양을 따라가지 않는게 중요한데.. 이건 베이스 음이 비트마다 다 다르니..... 예전에 비트박스 했던거 생색내는 중이다.), 4분 정도 되는 런닝타임이 엄청 짧게 느껴질 정도로 꽉 차 있다. 이 노랜 한 동안 들을 때마다 감동이었음. 흑인 음악을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은 나처럼 질질 짜진 않더라도 향수 좀 느끼지 않았을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프로듀서 진보가 참여하여 특유의 사운드를 마음 껏 펼쳐주신 "Friday야", 랩, 노래, 분위기 모두다 끈적끈적하게 한 데 잘 뭉쳐있는 슬로우잼 "Give it to me" , 다펑식의 기타 백킹마저 잘 활용한 "아름다운 그대" 등, 노래들이 전반적으로 다 준수하다. 아, 타이틀인 "Hug Me"에서 개코의 랩도 굉장히 인상적이고. 최근에 들었던 그 어떤 두 글자 플로우(?)보다도 더 잘만들어진 랩이라고 느꼈다. 다만 크러쉬의 보컬이 액센트나 목소리나 박자타는게 자이언티와 많이 닮아진 것 같아 아쉽긴 하다. "A Little Bit"듣고 자이언티가 피쳐링 했는 줄 알았어.. 프로듀싱에 비해서 보컬은 약간 설익은 모습도 간혹 보이고, 백화점식 구성이라 앨범으로 듣는 재미가 좀 떨어진 다는 점도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어쨌든 첫 앨범이 이 정도면 매우 준수하지. 지나치게 기대이상이었음 ㅋㅋㅋ





2. 태양 - Rise





 태양 1집은 진짜 좋았는데.. 전군이 만들었던 노래들은 진짜 좋았고, 앨범 프로듀싱이 테디로 수렴되었기 때문인지 앨범 자체로도 탄탄하다고 생각했다. 2집은 기대치에는 조금 못미친다. 클럽튠의 노래들도, 발라드풍의 노래들도 아쉬움이 좀 남는다. 타이틀곡인 "눈, 코, 입"은 확실히 대중의 구미를 당기는 것에는 성공했고, 나도 많이 들었다. 멜로디 라인이 좋아서, 들으면 누구나 흥얼거릴 정도로 각인이 잘 된다. 리메이크 프로젝트로 홍보한 것도 굉장히 영리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음원 차트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좀, 코, 입"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대중적인 흥행코드를 많이 따른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로 심플하게 태양의 목소리만 부각시킨것도 좋았다. 근데 뭐가 문제여.......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아쉬움 ㅋㅋㅋ 너무 노말해. 흑인 음악에 참 잘 어울리는 보컬, 리듬감 때문에 갖고 있는 기대감을 저버린 좀 무난한 스타일이라 그런 것 같다. 상반신을 드러낸 뮤비도 디 앤젤로의 "Untitled"뮤비를 생각나게 하는데, 노래도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ㅜㅜ


 타이틀 곡에서 느낀 아쉬움은 앨범 전체의 아쉬움과도 비슷하다. "새벽 한시", "링가 링가"등 클럽튠의 노래들도 나쁘지 않고, "Love You To Death"도 괜찮은데, 좀 태양만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이 대중적인 앨범을 만들려는 욕심과 맞물리면서 많이 흐릿해진 것 같다. 지난 앨범은 빅뱅, 그리고 여타 가수들의 음반과 다른 색깔을 찾을 수 있었는데, 물 탄 맥주마냥 밋밋해졌다. 다시 말해 '탈아이돌급의 흑인음악을 할 수 있는' 뮤지션으로서의 태양은 이 앨범에서 찾기 힘들어.. YG라는 거대한 회사에 속해있고, 회사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방향의 프로듀싱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도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태양의 이번 앨범은 굉장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 개인적인 음악적 만족도와는 별개로 보컬도 지난 앨범에 비해서 일취월장한 것 같고. 그리고 성공했으니까 솔로 3집도 또 나올 수 있는 것 아니겠어?





3. 40 - Canvas





 40는 2011년에 첫 EP인 <Got Faith>를 만들면서 데뷔한 R&B뮤지션이다. Chill하기 좋은 사운드와 자극적이지 않은 멜로디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40의 목소리와 보컬은 남다른면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 답지 않은 질감은 분명히 있는데, 흑인의 목소리와는 또 많이 다르다. 화려하지 않아도 호소력있고, 굉장히 안정적으로 노래들과 잘 어우러졌다. "Zodiac", "Faith"는 안들어 봤다면 한 번 들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넋"도 괜찮고.


 이번에 나온 EP <Canvas>도 역시 지난 EP와 그 궤를 같이 한다. 타이틀곡인 "Black"은 스윙스가 피쳐링으로 참여한 버젼과 노래만 담긴 버젼으로 나뉘어져있는데, 둘 다 좋다. 개인적으로는 랩 없는게 더 좋다. 치고 나가지 않고 가라앉는 듯한 후렴구도 그렇지만 가사가 주는 명확한 이미지도 인상적이다. 마치 뭐랄까.. 흑백화면에 하이힐과 장미만 빨간색으로 도드라진 1900년대 중반 뉴욕st의 이미짘ㅋㅋㅋㅋ 섬세하게 속삭이는 "예뻐"도 몇번을 돌려 들었다. 아니 난 남잔데 왜?!ㅋㅋㅋ


 전작들보다 확실히 대중적인 멜로디가 많아졌다는 것은 장점이자 나에겐 단점인데, 어쨌거나 트랜드를 쫓지 않고 40만의 음악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박수 열두번쯤 쳐주고 싶다. 일렉트로 사운드는 자제하고, 피아노를 앞세워서 비교적 심플하게 편곡했지만, 굉장히 섬세하게 작업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음악에서 뿐 아니라, 보컬에서도. 짧기는 하지만 이 앨범이 하나의 앨범이다라고 느낄 수 있을 만한 통일감, 그리고 포티의 음악이다라고 정체성을 드러낸 음반 같아서 좋다. 장인정신이 있어.





4. 라디 - <Soundz>





 원래 좀 말랑말랑하고 지나치게 속삭이는 것 같은 음악이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사실 라디는 첫인상부터 별로 안 좋았다. 헐. 니깟게 뭐라고 좋고 나쁘고를 따져 ㅋㅋㅋㅋ 스타덤 소속으로 데뷔하던 때에 처음 알게 되었던 Ra.D는 그의 이름에서 Ra가 Real Artist의 약자였다. 근데 철없던 어린시절 쓸데없는 힙부심과 음악부심을 가진 나로서는 신인 뮤지션이 저런 이름을 달고 나온것이 굉장히 불쾌하고 용납하기 힘들었었나보다. 병신같앜ㅋㅋㅋㅋ Ra앞에 Wanna be라는 말이 붙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건 좀 많이 시간이 지난 뒤였다. <Realcollabo>가 나오던 시절에 잠깐 좋아하기도 했지만, 역시 내 스타일은 아니라며 좀 잊고 지냈다. 그리고 6년이 지나 세번째 앨범이 발매되었다. 진짜 오랜만.


 사실 이번 3집 앨범도 굉장히 늦게 들었다. 바쁘기도 했지만 땡기는 아티스트가 아니었던지라. 근데 한 번 정주행하고나서 생각이 싹 바뀜 ㅋㅋㅋㅋ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사운드 소스들도 그대로 활용하면서 앨범의 통일성 뿐 아니라 라디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음악적 색의 통일성을 얻어냈다. 세련된 어반 사운드를 기반으로 때로는 펑키(Funky)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노래들을 들려준다. 노래의 구성도, 트랙들의 배치도 적절하다. 트랜디 하지도 않고, 몰개성하지도 않으면서 한 우물을 깊게 파고 있는, 진짜 아티스트의 냄새가 나더라. 이 쯤 되니까 내가 싫어하던 그의 속삭이는 보컬마저도 개성으로 느껴짐 ㅋㅋㅋㅋㅋ


 인트로격인 1분 38초짜리 "봐줘"를 지나 두 번째 트랙인 "For Me"쯤 오니까 이미 반했음 ㅋㅋㅋㅋ 초창기 Joe가 생각나는 사운드와 멜로디 -심지어 후렴구의 목소리 마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는 10여년전 어반 R&B의 향수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가사도 진짜 적절하게 잘 어울렸고. 아프리카 리듬이나 우쿨렐레 같은 악기들도 곡과 잘 어울리게 적절하게 배치했다. "Hawaii"의 여유로움과 "아직도"와 같은 발라드 트랙도 앨범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발라드 트랙들은 지금까지 라디를 좋아하던 대중들을 충족시켜줄만한 노래들이다. 다만 UMC, 킵루츠, 현상이라는 추억속 이름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은 좀... 올디함이 그대로 남아있는 목소리와 랩은 아무리 1세대여도 듣고 있기 힘들더라. 촌스러운게 컨셉이라고 해도 좀 심했다.





5. 태완 - <As I Am>





 태완이 새 앨범을 내다니!!!! EP이긴 하지만 태완이 새 앨범을 내다니.. 이 앨범을 들으면서 진짜 R&B가 대세이긴 하구나 라고 느꼈다. 태완 a.k.a. C-Luv는 오래된 흑덕에게는 참 반가운 이름이다. 오래전부터 많은 래퍼들의 노래에 피쳐링을 해왔고, 프로듀서로서도 오래전부터 완전히 자리를 잡았었으니까. 첫 앨범은 찾아보니 2006년이었더라. 그리고 8년만에 나온 새앨범이다. 와.. 이렇게 오래된(?) 국내 R&B장인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니 내가 안 기쁠 수 있나...ㅜㅜ 형님들 어찌 참았어 그동안...ㅋㅋㅋ


 태완의 새 앨범은 앞서 이야기 한 그 어떤 앨범보다도 트랜디하다. 사실 태완이라는 뮤지션이 해온 음악은 트랜디한 R&B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본토 R&B가 가진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정도를 잘 지켜왔다고 해야할까.. 소수취향에 빠지지도 않았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수취향은 우리나라 기준이다.- 그렇다고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지나치게 팝적인 노래를 해오지도 않았다. 이 앨범도 마찬가지인데, 인트로격인(그리고 인트로에만 머무르기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되는) "Luv Melodies"를 지나면 새로운 출사표를 던지는 "History"가 나온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어반 사운드, 착착 감기는 가사, 무엇보다 자기가 잘하는 스타일을 잘 아는 것 같다. 트렌디한 이 노래에는 같은 브랜뉴뮤직 소속인 산이가 피쳐링을 했는데, 트랜디한 노래 아니랄까봐 산이의 랩도 굉장히 트랜디한(?) 스타일의 랩이다. 아니 근데 아무리 트랜디한 노래라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랩을 만들어도 되나...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Body Work". 이유는 섹시하니까. 가사는 섹시하고, 보컬은 섬세하고, 멜로디라인은 유려하다. EP라서 트랙수도 많지 않지만 노래들이 대부분 3분대로 짧은편이라 런닝타임이 좀 많이 짧게 느껴지는게 아쉽지만, 뽐내거나 과시하는 것 없이 정도를 잘 지킨 앨범이다. 지금까지 그가 꾸준히 보여줬듯이. 그리고 덕분에 우리나라 R&B 씬이 더 풍요로워진 것 같은 기분이라 흑덕으로 마냥 감사합니다ㅜㅜ






 뭐 요즘엔 앨범에 열대여섯곡씩 빽빽하게 채워서 내는 음반이 없다보니, EP로 나오거나, 열트랙 안팎의 정규앨범이 나오는게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일이지만, 그냥 내가 목말라서 아쉽긴 하다. 그래도 뭔가 선택지가 많아서 행복한 여름이었음. 1년에 한 두장 나와도 이상할 것 없는 음반들이 두 달 새에 이렇게 많이 나왔으니까. 그것도 이렇게 멋진 음반들로. 무엇보다 R&B 앨범에서 뽕끼들이 사라졌잖아?? 예전엔 해외 R&B와 국내 R&B는 다른 장르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젠 국내 R&B도 그냥 R&B야. 그들 부럽지 않은(은 좀 오바스럽지만) 사운드에 가사는 우리말이야. 이보다 좋을 순 없지. 아, 그리고 같은 흑덕인 사촌동생이 R&B여신 보니님의 공연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다던데, 얼굴이 완전 아이돌 뺨치게 예뻐지셨다고....ㅜㅜㅜ 보니님 이제 다시 활동을 시작해봅시다!!!! 물 들어올때 노 저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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