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회 서울 연극제에 100인의 관객평가단으로 참여했다. 창작극과 번안극으로 이루어진 쟁쟁한 10작품이 출품되었고, 나는 6작품을 관람하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더 많이 보고 싶었지만, 6개 보는 것도 죽을뻔 했다. 왜 항상 이런걸 신청한 시기는 바쁘거나 아픈걸까. 어쨌든 여섯작품의 간단한 후기.


1. 극단 그린피그 <공포>

 안톤 체홉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작품. 분명 지금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작품인데, 체홉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성공적인 오마주 작품이었다. 체홉스러운 작품답게 보기 편한 연극은 아니었지만, 일상에 스며든 공포들이 다양한 인간군상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었다. 특히나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면서도 위선적이었던 농장 주인 내외가 가장 와닿았고, 뒤늦게나마 자신의 죄를 터놓았던 조시마 신부의 대사들이 인상깊었다차분함을 유지하다 폭발하던 체홉역의 이상홍 배우님의 연기도 좋았다. 특히나 성경구절과 함께 토해지듯 쏟아지던 대사들을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되었다. 때로는 찔렸고, 때로는 아팠다. 특히나 무대가 너무 예뻤다. 스러져가듯 기울어져있는 나무들이 마치 등장인물처럼 위태롭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배우들의 의상도 그 시절의 의상처럼 자연스러웠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리역의 김수안 배우님이 정말 예뻤다...


2. 프로젝트 아일랜드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체코의 작가인 뻬뜨르 젤렌카의 작품을 번안한 번안극. 영화로도 나와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관객 평가단 평가에서 별 다섯개를 주었던 작품. 실제로 만점인 작품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39회 서울연극제의 대상작품이기도 했다. 사실 이 날 낮부터 회식 비스무리한 것을 하느라 술을 먹고.. 마지막엔 양꼬치집에 있다가 나왔는데.. 다행히 한쪽 구석자리이긴 했지만 진짜 옆사람한테 너무너무 미안하더라. 내 옆자리 사람이 술먹고 왔으면 속으로 오만 욕을 다했을텐데.. 어쨌든 담배를 물고 무심한 표정으로 옆집 사람들의 행위(?)와 친구의 행위(?)와 부모님을 대하던 남동진 배우님의 연기가 너무나 머릿속에 강하게 와 닿았다. 독특했지만 일상적이었고, 평범했지만 미친사람들이었다. 그런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전혀 거북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감에 씁쓸해졌을 정도로.. 내용도, 연기도 좋았다. 기회가 되면 영화도 보고 싶어졌다.


3. 연극집단 반 <이혈>

 화려하게 꾸며놓은 조명과 무대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촌스럽던 연출과 연기. 90년대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내러티브가 부족해서 주요 인물들의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극단적이었을 뿐...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과장되어서 가끔씩 터져나오는 실소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무대 곳곳이 잘 활용되었고, 조명을 너무 잘 써서 감각적인 무대를 만드려는 노력은 느껴졌다. 웹툰작가가 주인공인 연극이라서 그런지 무대와 연기에서 만화적 질감도 느껴졌다. 그래서 "씬시티"가 머릿속을 스치고 가기도 했지만, 그런 섬세한 무대마저도 그저 과하고 촌스럽게 느껴질 연기와 연출이었다. 


4. 창작집단 상상두목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

 그 슬펐던 상황과 전혀 관계 없던, 아니 관심없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가 이야기의 포인트였다. 영화 택시운전사나 1987이 떠오르는 시놉시스인데, 주인공들이 극적으로 바뀌는 순간의 쾌감이 있는 영화라면, 이 작품은 끝까지 사건과는 거리를 두었다. 자신만의 이익을 쫓던 얼간이 같은 세 주인공은 결국 사건의 한 가운데 있게 되었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 덜 무거웠지만 오히려 일상조차 무너져버리고 부당하게 당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나름대로의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좋은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일단 초중반이 지루하다. 세 명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캐릭터 쇼가 되어야 하는데, 잘 살지 못했던 것 같다. 둘째로 민주화운동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장면. 그냥 세 명의 주인공 위주로 끝까지 끌고가는게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다. 


5. 극단 하땅세 <그 때, 변홍례>

 재밌었고, 아쉬움도 많이 남았던 작품. 후시녹음을 하던 그 당시 영화의 질감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잘 살려서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직접 녹음을 하고 입모양만 따라하기도 했고, 변사도 있었으며, 효과음은 무대 한쪽에서 직접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흰 배경에 나타나는 그림자를 잘 활용했다는 점. 그림자에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나 정서를 부각시켜 실제 등장인물의 감정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대에 가득차있는 장난질이 그렇게 좋았다. 내 스타일 ㅋㅋ 다만 변홍례라는 인물이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려주지 못한 느낌. 연출에 묻혀버렸지만 홍례가 무엇때문에, 왜 그랬는지를 모르겠어. 이것조차 그 당시 B급 영화들의 느낌을 낸거라면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래도 난 좀 아쉬웠다. 실제 신문에 나온 사건을 모티브로 했는데, 연출역을 맡은 배우가 몇 번이나 "우리는 연극을 하는거니까"와 같은 대사를 뱉었다. 일부러 거리를 조금 두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작가, 혹은 연출가가 실제 사건을 다루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원작 대본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6. 극단 피악 <오를라>

 컨디션이 매우 안좋았던 날 보았던 연극. 게다가 1인극이라니 ㅋㅋㅋ 보통은 "저 사람은 왜 미쳤을까?"를 풀어내는 것에 집중한다면, 이 작품은 "사람이 미쳐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어떻게 미쳐가는가"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정상이던 사람이 미쳐서 미친짓을 할 때까지를 그려냈다. 특히나 벗어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딱 보면 알지만 그냥 어려운 작품. 그래도 그 안좋은 컨디션으로 봤는데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한윤춘 배우님이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풍겼기 때문인 것 같다. 



 연극 보러 가는 날마다 내가 이걸 왜 신청해서 이 바쁘고 힘들때 이 고생인가..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또 신청하고 싶다. 좋은 작품들이었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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