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트랙리스트를 쭉 한번 읽어보았다.

1. 소멸의 시간
2. Grace Kelly
3. 감긴 눈 위로 비추는 불빛
4. 바라밀다(Pt.1)
5. 바라밀다(Pt.2)
6. 구원의 손길
7. 텅빈 눈동자(Pt.1)
8. 텅빈 눈동자(Pt.2)
9. Connection

 기대감을 확 심어주는 트랙리스트다. 여백과 절제, 그리고 (이 단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강렬한 것들이 몰아쳐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잠비나이 - [차연]



 앨범을 들어볼 수 있는 링크입니다. 들으시면서 읽어주세요. 여기입니다! 클릭하시면 들어갑니다.



 앨범의 제목인 차연은 무슨뜻일까.

차연(Différance)은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만든 용어이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 differ)두가지 말을 결합해 만든 것이며, 언어가 말을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위키백과 발췌

 몇 가지를 찾아봐도 정확히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는데, 한 가지 떠올랐던 이론은 불확정성의 원리.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 차연의 의미를 데리다 본인도 정확하게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차연이란 단어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차연이란 단어를 통해서 데리다가 하고 싶은 말이 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뭔 개소린지.. 아주 자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언어라는 불완전한 것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완벽하게 교감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만든 단어가 아닐까 싶다. 사실 집에 아버지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데리다의 책이 몇권 있었는데, 읽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어렵다....

잠비나이 EP [잠비나이] 커버.



 아무튼, 그들이 이 단어를 앨범명으로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차연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과 불안정성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데리다가 이 단어를 통해서 언어의 한계성을 환기시켰듯, 이 사람들도 기존의 음악적 관습이나 기존의 소리에 반기를 드는 의미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반기라는 표현은 좀 그렇긴 한데, 아무튼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도'라는 의미로. (정작 이들에게 앨범 제목에 대해 물어본다면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듯, 쿨하게 대답할 것 같다. 그냥 내가 그동안 봐온 잠비나이의 인터뷰를 봤을때 느낌이 그렇다. 예전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에서 영화 제목을 붙일 때, 영화의 의미를 내포하기는 커녕, 별다른 의도없이 제목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이 들도 아예 의미를 배제하지는 않더라도 가끔 비슷한 맥락에서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EP에 수록된 '나부락'처럼. 이일우씨가 기르던 애완동물 이름이란다; 혹시 만약에 설마 잠비나이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꼭 대답해주세요. 이 제목 뭐에요?ㅋㅋ 알아서 해석하라구요? ㅇㅇ알겠슴.)



국악과 록, 동양과 서양의 격렬한 입맞춤.
 앨범 전반에는 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과 포스트록과 프리재즈와 동양의 소리와 정서가 혼재되어있다. 그리고 아주아주 격렬하게 변하며, 격렬하게 주고 받는다. 첫번째 트랙 소멸의 에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메탈스러웠다. 물론 잠비나이의 멤버 이일우씨가 메탈의 광팬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당황스러웠던 이유가, 거문고나 해금이 가지고 있던 동양적 느낌은 상쇄되고 드럼과 기타를 비롯한 밴드음악에 그대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강렬하다. 이런 강렬함은 두번째 곡 Grace Kelly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강한 소음에 이어 나오는 동양적 기타선율과 변형된 여자보컬의 목소리는 정말 그로테스크하다. (제목은 왜 Grace Kelly였을까? 그 그레이스 켈리가 맞나?) 결과적으로 이 곡, 정말 좋다. 들을 수록 좋다. 


잠비나이 - Grace Kelly. 스페이스 공감 영상. 살짝 긴장들 하신듯.


  분위기는 반전된다. 감긴 눈 위로 비추는 불은, 의미도 없이 무작위로 배열된 듯한 짧은 해금과 거문고와 피리들 아래로 진동음이 서서히 긴장감을 고조시키다가 밝은 분위기로 극적인 전환을 하는데,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눈을 감고 지나다가 터널끝에 다다라 따스한 햇볕을 마주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과거의 그것들은 그저 삶의 많은 파편들 중 하나였다는 듯, 앞부분의 소리들을 머금은 변주를 들려준다. 제목부터가 동양스러운 바라밀다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실려있다. 바라밀다는 여백과 절제, 그리고 발작(?)에 가까운 폭발이 돋보이는 노래다. Part.1같은 경우는 진동음이 내는 긴장감에 숨도 쉬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Part.2 중반의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 더욱 강렬하다. 특이한 점은 이 노래에서는 서양의 악기들에서도 동양의 느낌이 강하게 났다는 것. 목탁을 두드리는 듯한 기타소리나, 커다란 동양의 종을 치는 듯한 베이스와 드럼소리. '피안에 도달한다'라는 뜻의 바라밀다. 노래가 그 깊은 숲속의 어둑한 절의 느낌을 잘 살려준것 같다. 물론 그것 치고는 너무 호러느낌이긴 하지만 ㅎㅎ

 다음은 그냥 '하드록'같은 구원의 손이 나온다. 노래 중반부의 피리와 해금소리가 강렬한다. 사실 이런 음악을 듣다보면 매우 하드한 록 음악에 이런 악기들을 섞는 것이 이리도 자연스러울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말이 더 새기전에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면, 다시 두 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텅빈 눈동자가 나온다. 정중동과 동중정, 심연의 슬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 반복되며 점층되는 구조가 나선형 계단을 따라 어두운 곳으로 한 없이 깊숙히 내려가는 듯 하다. 거문고 몸통을 두드리는 그 소리에 난 왜 이렇게 설레는고..... 두근두근.

이일우(기타, 피리, 태평소, 생황), 김보미(해금, 트라이앵글), 심은용(거문고, 정주)



 마지막 곡은 Connection인데, 앨범의 초반부는 가장 동양적인데 중반부에 접속이 되는 듯한 소음이후에 급격하게 분위기가 바뀐다. 그리고 처음으로 앨범에서 가장 '멜로디스러운' 부분이 해금으로 연주된다. 그리고 선율은 의외로 발칸반도쪽의 음악같다. 그런 의미에 커넥션이었던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조금 뜬금없어서, 곡으로 보면 조금 실망스러웠는데, 앨범의 마지막 대미로 생각하면 그럭저럭 수긍할만한 트랙이긴 했다. 적어도 앨범을 들으면서 내내 긴장해서 움츠려져 있던 어깨가 처음으로 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망한 리뷰, 굉장한 음반.
 리뷰를 다 쓰고나니 든 생각은, 내가 너무 생각이 많았다. ㅇㅇ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들이 내게 던져준 음악은 너무 광범위했다. 그래서 결국 해석은 청자의 몫이 된 것 같은데, 해석을 너무 열심히 했나보다.ㅋㅋㅋ 여기서 썼다가 쑥쓰러워서 지운것까지 포함하면;; 결론은 좋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다. 앨범 자체가 어떤 소리들의 조합에 관한 실험의 결과물인 것 같다. 따라서 이 음악을 기존의 관습적인 장르 규정으로 정의하는 것은 앨범을 감상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실험의 결과를 있는 그대로 듣고 각자의 방법으로 감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한번쯤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앨범이다.(취향탓에 강권하지는 못하겠고;) 아, 겁많은 친구들은 밤에 혼자 들으면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호러/스릴러물의 상상력을 자극하더라.


EP수록곡 나부락. 이 라이브는 진짜다!!



 잘 되기 힘든 음악인거 알지만, 잘 되었으면 좋겠다. 앨범이 발매되고 났는데도 아직 1집 발매기념 공연티켓이 매진되지 않은걸 보면 하아.. 참 힘든 길을 가고 있구나 싶지만. 이 앨범이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p.s. 저는 여기 갑니다!!


얼른 예매 하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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