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대를 하고 가지 않았다. 극한의 상황을 마주하고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설정은 이미 많은 연극과 영화를 통해서 지겹도록 많이 봐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진짜 괜찮은 작품들도 있었고.. 종말이라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는 분명 낯선 상황이지만, 결코 신선할 수 없는 소재다. 그래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래도 꽤 재밌었다. 돌아보면 허점투성이고, 중반까지 보고 있기 민망해서 여러 차례 고개를 떨구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나올 땐 배우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히죽거리기도 했고 ㅎㅎ


 설정과 디테일이 과학적이지 않은 것은 일단 접어두자. 어차피 현실을 이야기 하는 연극은 아니니까. 정리가 되지 않은 듯 어수선하고 지저분했던 무대디자인도 종말론의 연장에서 그렇게 표현 된 거라고 치자. 하지만 어색했던 연기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똑똑하고 예쁜 대학생 역으로 나온 배우는 일단 예쁘지 않다. 배우분께는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스토커가 붙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예뻐야 할 역할인데 안 예쁘고 매력도 없다. 그리고 너무 뻣뻣했다. 온 몸이 굳어 있는 것이 긴장해서 그런 건지 몸을 풀지 않고 연극을 했던 건지 아님 원래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건지.. 연기를 못 하기도 하지만 일단 발음이 너무 부정확했다. 발음 교정이 시급하다. 학교 연극반 아마추어보다 연기도, 발음도 어색했다. 다른 분들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는데, 유독 한 분이 자꾸 튀니까.. 이게 안쓰럽기도 하고, 몰입이 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중반부까지는 극이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극 속에서 예상치 못한(그러나 관객들은 충분히 예상했던)상황으로 모두가 본성을 드러내며 끝을 향해 치달았다. 그러나 반전은 여기서부터 ㅋㅋㅋ 본성을 드러내고 싸우고 죽이고 끝나고 난 뒤 씁쓸함과 찝찝함을 남기며 인간의 욕망과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미지근한 결론을 택하지 않고, 철저하게 판타지와 난장에 집중했다. 마치 영화 <캐빈 인 더 우즈>가 생각날 법한 후반부 난장이었다. 배우들은 연극 속에 자신이 맡은 역할에만 몰입하지 않았고, 때로는 배우 그 자신으로, 때로는 관객으로 변하며 마치 ‘나도 몰라ㅋ 이 연극은 원래 끝이 막장임ㅋ’라고 말하는 듯 했다. 막장에서 더 막장으로, 난장에서 더 난장으로, 그러더니 갑자기 외계인 등장 ㅋㅋㅋ 말 그대로 연극을 안드로메다로 보냄 ㅋㅋㅋㅋ


 글쎄, 어설프게 진지했다면 정말 별로였을꺼고, 어설프게 웃기며 마무리하려 했다면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나왔을 것 같은데, 연출가가 이 연극의 장르를 판타지 SF 난장 활극으로 만들겠다고 작정한 것 같았고, 이를 의도했다면 굉장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후반부에 현실감을 버린 대신에 극이 굉장한 활력을 얻었고, 흐트러진 개연성마저도 뭉개버린 효과를 얻었다. 그리고 그런 난장 속에서도 대충 되는대로 물감 뿌려 버리고 끝낸 것이 아니라 집중력을 가지고 마무리한 것 같았다. 사실 판타지 SF 난장 활극 뭐 이런 건 내 취향임 ㅋㅋㅋㅋ 오랜만에 심각하지 않게 연극보고 웃고 나온 것 같아서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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